고통에 답하다(36)
고난이 왜 다가왔는지 말해주는 성경의 첫 그림은 창세기에 있다. 태초에 에덴동산에는 죽음이 없었다. 고난도 없었고, 죄도 없었다. 창세기 1장에서 반복되는 단어는 히브리어 “토브”이다. “보시기에 좋았더라”에서 ‘좋았다’는 의미가 “토브”인데, 오늘날 말로 하면, “행복”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사람에게 주시고 싶어 하던 것은 “행복”이었다. 신10:13에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주신 규례들은 인간의 행복을 위함이라는 뜻이다. 신33:29에는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는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위해 친히 나서시겠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에게 인간은 바로 자녀와 같다.
그러나 에덴동산에서 죽음이 시작되어버렸다. 형이 동생을 죽이는 최초의 살인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담과 하와의 자녀 대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가인은 동생을 죽이고 나서 동생을 찾는 하나님께 대들기 시작했다. “내가 동생을 지키는 자니이까”(창4:9)
친밀하던 하나님과 낯설어지기 시작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에덴동산에서 뱀의 유혹에 빠져서 하나님을 대적하며 “선악과”를 먹기 시작할 때 부터였다. 단순히 “선악과”를 먹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불순종의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과 겨룰 수 있는 존재가 되기로 결심하여 “반역”을 일으킨 행위를 말한다. 이것을 성경은 “죄”라고 말한다. 죄의 결과 사람은 하나님의 의도와는 멀리 살기 시작했다. “가시와 엉겅퀴”가 삶에 가득하게 되었다. 최선을 다해 살았지만 절망이 모든 것을 뒤덮어버렸다. 건강을 원했지만 질병이 들어왔고, 행복을 원했지만 불행이 지배해버렸다. 당장 안전하지만 영원한 보장이 되지 않는 곳이 세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설계도와 달라졌다. 중학교 때 기술시간에 선생님이 내준 “설계도” 숙제는 어린 나이에 선생님께 칭찬받기 위해 모든 것을 건 순간이었다. 연필을 서너 자루를 준비해서 설계도에 나온 선 굵기에 맞춰 칼로 다 깍고, 복잡한 설계도를 그대로 따라 그렸다.(처음에는 무식하게 한 자루였다) 어린 손으로 하다 보니 조금씩 지저분해졌다. 그렇지만 정말 최선을 다했다. 각 선에 나오는 치수며, 선 굵기 치수에 맞춘 선 두께는 흠잡을 데가 없었다. 그런데 선생님은 내 “설계도”를 선택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모두 내 설계도를 보며 감탄했지만, 선생님은 훨씬 깔끔한 설계도를 그린 아이를 칭찬해주었다. 나는 멍하니 내 설계도를 보며 눈물을 삭여야 했다. 아빠가 건축사였던 아이가 그린 설계도면은 나와 차원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무엇인가 불공정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뜻밖의 사건은 내가 죄를 반드시 지었기 때문이 아니다. 고난도 내 죄 때문만은 아닐 수 있다. 그냥 죄가 불러온 결과일 뿐이다. 우리는 이 길을 걸어가야 한다. 뭔가 억울하지 않는가...“하나님. 좀 더 좋게 할 수 있지 않으신가요?”
우리는 때로 내 상태와 관계없이 하나님은 내게 좀 더 좋은 것을 주셔야 하는 분으로 생각할 때가 많다. 그런데 그 배후에는 하나님의 설계도가 인간에게 넘어가 엉망이 된 채 돌아온 후에 일어난 결과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 도리어 에덴동산에서 흘러나온 반역의 기류 속에서도 세상에 여전히 행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는 푸념 속에 묻힌다. 그러므로 세상의 고통의 문제는 태초에 인간이 만든 오염에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창3:9)
<예수다솜교회 박두진 목사>
고통에 답하다(36)
고난이 왜 다가왔는지 말해주는 성경의 첫 그림은 창세기에 있다. 태초에 에덴동산에는 죽음이 없었다. 고난도 없었고, 죄도 없었다. 창세기 1장에서 반복되는 단어는 히브리어 “토브”이다. “보시기에 좋았더라”에서 ‘좋았다’는 의미가 “토브”인데, 오늘날 말로 하면, “행복”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사람에게 주시고 싶어 하던 것은 “행복”이었다. 신10:13에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주신 규례들은 인간의 행복을 위함이라는 뜻이다. 신33:29에는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는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위해 친히 나서시겠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에게 인간은 바로 자녀와 같다.
그러나 에덴동산에서 죽음이 시작되어버렸다. 형이 동생을 죽이는 최초의 살인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담과 하와의 자녀 대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가인은 동생을 죽이고 나서 동생을 찾는 하나님께 대들기 시작했다. “내가 동생을 지키는 자니이까”(창4:9)
친밀하던 하나님과 낯설어지기 시작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에덴동산에서 뱀의 유혹에 빠져서 하나님을 대적하며 “선악과”를 먹기 시작할 때 부터였다. 단순히 “선악과”를 먹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불순종의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과 겨룰 수 있는 존재가 되기로 결심하여 “반역”을 일으킨 행위를 말한다. 이것을 성경은 “죄”라고 말한다. 죄의 결과 사람은 하나님의 의도와는 멀리 살기 시작했다. “가시와 엉겅퀴”가 삶에 가득하게 되었다. 최선을 다해 살았지만 절망이 모든 것을 뒤덮어버렸다. 건강을 원했지만 질병이 들어왔고, 행복을 원했지만 불행이 지배해버렸다. 당장 안전하지만 영원한 보장이 되지 않는 곳이 세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설계도와 달라졌다. 중학교 때 기술시간에 선생님이 내준 “설계도” 숙제는 어린 나이에 선생님께 칭찬받기 위해 모든 것을 건 순간이었다. 연필을 서너 자루를 준비해서 설계도에 나온 선 굵기에 맞춰 칼로 다 깍고, 복잡한 설계도를 그대로 따라 그렸다.(처음에는 무식하게 한 자루였다) 어린 손으로 하다 보니 조금씩 지저분해졌다. 그렇지만 정말 최선을 다했다. 각 선에 나오는 치수며, 선 굵기 치수에 맞춘 선 두께는 흠잡을 데가 없었다. 그런데 선생님은 내 “설계도”를 선택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모두 내 설계도를 보며 감탄했지만, 선생님은 훨씬 깔끔한 설계도를 그린 아이를 칭찬해주었다. 나는 멍하니 내 설계도를 보며 눈물을 삭여야 했다. 아빠가 건축사였던 아이가 그린 설계도면은 나와 차원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무엇인가 불공정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뜻밖의 사건은 내가 죄를 반드시 지었기 때문이 아니다. 고난도 내 죄 때문만은 아닐 수 있다. 그냥 죄가 불러온 결과일 뿐이다. 우리는 이 길을 걸어가야 한다. 뭔가 억울하지 않는가...“하나님. 좀 더 좋게 할 수 있지 않으신가요?”
우리는 때로 내 상태와 관계없이 하나님은 내게 좀 더 좋은 것을 주셔야 하는 분으로 생각할 때가 많다. 그런데 그 배후에는 하나님의 설계도가 인간에게 넘어가 엉망이 된 채 돌아온 후에 일어난 결과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 도리어 에덴동산에서 흘러나온 반역의 기류 속에서도 세상에 여전히 행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는 푸념 속에 묻힌다. 그러므로 세상의 고통의 문제는 태초에 인간이 만든 오염에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창3:9)
<예수다솜교회 박두진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