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에 답하다(35)
우리가 경험하는 악이 반드시 악으로 끝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일본에 311 쓰나미가 동 일본을 집어삼켰을 때 수많은 사람이 가옥을 잃고, 행방불명이 되었다. 방사능은 유출되었고, 전 지구적으로 공포에 떨어야 했다. 그런데 이 끔직한 사건을 통해 누군가는 재난을 보며 가족에게 돌아갔고, 자선봉사활동을 통해 정서적인 재활을 경험하기도 했으며, 방사능 공포를 뚫고 자기 동포를 도우려고 선한 발길들이 이어졌으며, 집을 잃고 가족을 잃은 많은 이들이 큰 위로를 받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기울어가던 생필품 회사들은 피해자들을 위한 기부로 다시 회생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일본이라면 학을 떼던 이들이 이 때만큼은 작게나마 도움의 손길을 펼치기도 했다.
악은 분명히 속을 뒤틀리게 한다. 하지만 어두운 면으로 반드시 끝나지만은 않는다. 이런 대재앙은 우리에게 마냥 웃게 만들 수 없지만, 적어도 겸손해지거나 경외심과 탄성을 지를 수 있게 만든다. 그래서 끔직한 악을 마주하더라도 도리어 신앙을 되찾는 이들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악을 보며 하나님의 선하심을 비난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인간 안에 선악을 판단하는 도덕적인 감정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유발 하라리는 “인지혁명”을 통해 진화과정에서 사람들이 도덕성을 가지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인간이 공동체생활이나 전쟁 등을 통해 옳고 그름을 스스로 깨닫고, 해야 할 행동과 말아야할 행동을 구분했다는 것이다.
정말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가? 우리는 왜 비도덕적인 행동을 하면 양심에 부담이 될까? 아무도 없어도 내 자신이 왜 스스로 잘못했다는 것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는 것일까? 이런 감정은 하나님의 존재없이는 설명하기 정말 어려운 문제이다.
악을 악이라고 말할 수 있는 선명한 틀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만 나올 수 있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람이 C.S. 루이스였다. 그는 악을 보며 하나님을 거부했다. 그러나 그는 악을 인식하는 과정을 통해 세상에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세상의 악을 보면서 하나님을 욕한다면, 적어도 하나님이 도덕적인 존재라는 것을 어느 정도 인정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하늘을 보면서 삿대질을 하고 있다면, 저 하늘에 정의가 있음을 심연에 깔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악에 대해서 분노할수록 사실은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어진다.
만약 도덕이 인간이 만든 것이라고 한다면, 그렇게 믿는 사람을 통해서 세상이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지는 이미 히틀러나 수많은 전쟁광을 통해서 증명되었다고 본다. 만약 인간이 도덕을 만든 존재라고 한다면, 도덕 자체가 인간의 주관성 아래에 있기 때문에, 도덕은 충분히 광기에 사로잡힐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반드시 객관적인 기준이 있어야 하고, 그 기준은 오직 하나님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교회를 악의 문제로 뛰쳐나온 사람들이 언젠가 교회로 다시 돌아갈 때 발걸음을 하기 겸연쩍고 민망하다. 누군가 끌어당겨주어야 한다. 언젠가 왜 돌아왔는지 사람들에게 이야기해 주어야할 때도 올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의 정의 앞에 설 때만 누군가를 평가하는 행위를 멈출 수 있다는 사실이다. 악을 미워하다가 하나님을 미워하게 되었지만, 정의를 정의하려고 하는 순간, 하나님을 빼고는 객관적인 기준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포기하는 순간 해답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악을 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불의와 폭력, 죽음과 절망, 죄에 대해 왜 분노하고, 왜 두려워해야 하는가? 단지 진화의 과정일 뿐인데 말이다. 우리는 왜 그런 고통을 향해 잘못이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오직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니체의 말처럼 정의는 한낱 인간의 문화의 결과물일 뿐인가? 아니다. 하나님이 없다면 정의도 세울 수 없고, 고통도 해결되지 않고, 절망을 맞설 능력도 사라질 뿐이다.
<예수다솜교회 박두진 목사>
고통에 답하다(35)
우리가 경험하는 악이 반드시 악으로 끝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일본에 311 쓰나미가 동 일본을 집어삼켰을 때 수많은 사람이 가옥을 잃고, 행방불명이 되었다. 방사능은 유출되었고, 전 지구적으로 공포에 떨어야 했다. 그런데 이 끔직한 사건을 통해 누군가는 재난을 보며 가족에게 돌아갔고, 자선봉사활동을 통해 정서적인 재활을 경험하기도 했으며, 방사능 공포를 뚫고 자기 동포를 도우려고 선한 발길들이 이어졌으며, 집을 잃고 가족을 잃은 많은 이들이 큰 위로를 받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기울어가던 생필품 회사들은 피해자들을 위한 기부로 다시 회생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일본이라면 학을 떼던 이들이 이 때만큼은 작게나마 도움의 손길을 펼치기도 했다.
악은 분명히 속을 뒤틀리게 한다. 하지만 어두운 면으로 반드시 끝나지만은 않는다. 이런 대재앙은 우리에게 마냥 웃게 만들 수 없지만, 적어도 겸손해지거나 경외심과 탄성을 지를 수 있게 만든다. 그래서 끔직한 악을 마주하더라도 도리어 신앙을 되찾는 이들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악을 보며 하나님의 선하심을 비난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인간 안에 선악을 판단하는 도덕적인 감정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유발 하라리는 “인지혁명”을 통해 진화과정에서 사람들이 도덕성을 가지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인간이 공동체생활이나 전쟁 등을 통해 옳고 그름을 스스로 깨닫고, 해야 할 행동과 말아야할 행동을 구분했다는 것이다.
정말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가? 우리는 왜 비도덕적인 행동을 하면 양심에 부담이 될까? 아무도 없어도 내 자신이 왜 스스로 잘못했다는 것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는 것일까? 이런 감정은 하나님의 존재없이는 설명하기 정말 어려운 문제이다.
악을 악이라고 말할 수 있는 선명한 틀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만 나올 수 있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람이 C.S. 루이스였다. 그는 악을 보며 하나님을 거부했다. 그러나 그는 악을 인식하는 과정을 통해 세상에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세상의 악을 보면서 하나님을 욕한다면, 적어도 하나님이 도덕적인 존재라는 것을 어느 정도 인정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하늘을 보면서 삿대질을 하고 있다면, 저 하늘에 정의가 있음을 심연에 깔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악에 대해서 분노할수록 사실은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어진다.
만약 도덕이 인간이 만든 것이라고 한다면, 그렇게 믿는 사람을 통해서 세상이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지는 이미 히틀러나 수많은 전쟁광을 통해서 증명되었다고 본다. 만약 인간이 도덕을 만든 존재라고 한다면, 도덕 자체가 인간의 주관성 아래에 있기 때문에, 도덕은 충분히 광기에 사로잡힐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반드시 객관적인 기준이 있어야 하고, 그 기준은 오직 하나님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교회를 악의 문제로 뛰쳐나온 사람들이 언젠가 교회로 다시 돌아갈 때 발걸음을 하기 겸연쩍고 민망하다. 누군가 끌어당겨주어야 한다. 언젠가 왜 돌아왔는지 사람들에게 이야기해 주어야할 때도 올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의 정의 앞에 설 때만 누군가를 평가하는 행위를 멈출 수 있다는 사실이다. 악을 미워하다가 하나님을 미워하게 되었지만, 정의를 정의하려고 하는 순간, 하나님을 빼고는 객관적인 기준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포기하는 순간 해답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악을 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불의와 폭력, 죽음과 절망, 죄에 대해 왜 분노하고, 왜 두려워해야 하는가? 단지 진화의 과정일 뿐인데 말이다. 우리는 왜 그런 고통을 향해 잘못이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오직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니체의 말처럼 정의는 한낱 인간의 문화의 결과물일 뿐인가? 아니다. 하나님이 없다면 정의도 세울 수 없고, 고통도 해결되지 않고, 절망을 맞설 능력도 사라질 뿐이다.
<예수다솜교회 박두진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