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에 답하다(28)
하나님께서 선하시지 않다는 생각은 믿는 사람도 가끔 한다. ‘하나님은 나를 구원하신 다음에 곧바로 천국을 가게 하시지 왜 이 세상에 두셨는가?’ 세상에서 당하는 끔직한 사건들은 우리를 진절머리가 나게 만든다.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신앙이 없는 이들에게 하나님은 친밀한 분이라도 느껴지지는 않아도 적어도 암담한 상황에서 신이라면 이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한다.
팀 켈러는 이렇게 ‘하나님은 선하지 않다’는 전제를 토대로 철학자들이 만든 “논리적 주장”과 “증거적 주장”이 있음을 말한다.1)
“논리적 주장”은 성경이 말하는 선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전능함과 세상의 악이 병립한다는 것 자체가 불합리하다는 것이다. ‘악은 신의 결핍’일텐데 신의 완전함은 악 자체로 부인된다는 논리다.
하지만 알빈 플란팅가는 ‘악의 존재와 신의 존재가 양립 가능하다’고 단언한다.2) 왜냐하면 악이 존재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부재한다고 말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악에도 필요악이 있고, 인간이 잘못보는 위장된 악이 있으며, 신의 영원적 관점에서 악의 허용이 절대적 선일 수 있기 때문이다. “논리적 주장”이 무신론의 분명한 근거가 되지 못 하게 된 이유이다.
그래서 철학자들이 새롭게 들고 나온 것이 “증거적 주장”이다. 인간이 당하는 고난만 보더라도 하나님이 없다는 것은 충분히 증명된다는 것이다. “나의 살과 가죽을 쇠하게 하시며 나의 뼈들을 꺽으셨고 고통과 수고를 쌓아 나를 에우셨으며 나를 어둠 속에 살게 하시기를 죽은 지 오랜 자 같게 하셨도다”(애3:3-5)
고난, 재난, 절망은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끊기에 충분하기 보인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고난은 도리어 무신론을 강화하기보다 하나님의 존재를 찾게 하며, 악을 회개하여 돌이키게도 한다. 이렇듯 하나님을 증명하는 도화선이 고난이 된다는 역설에서 “증거적 주장”의 논리도 역시 약화되어버렸다.
하나님이 없다고 말했던 철학자들의 주장이 이렇게 힘을 잃은 이유는 무엇인가? 인간에게 덮힌 그림자의 편향성이 결코 하나님의 광명의 크기까지는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 어디에 계시나이까? 나를 도우소서” 이것은 사실 모든 인간의 외침이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애3:33)
<예수다솜교회 박두진 목사>
1)팀 켈러, 고통에 답하다, 143.
2)알빈 플랜팅가, God, Freedom, and evil(Erdman,1974), The Nature of Necessity(oxford university press, 1974), 팀 켈러, 고통에 답하다, 143 재인용.
고통에 답하다(28)
하나님께서 선하시지 않다는 생각은 믿는 사람도 가끔 한다. ‘하나님은 나를 구원하신 다음에 곧바로 천국을 가게 하시지 왜 이 세상에 두셨는가?’ 세상에서 당하는 끔직한 사건들은 우리를 진절머리가 나게 만든다.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신앙이 없는 이들에게 하나님은 친밀한 분이라도 느껴지지는 않아도 적어도 암담한 상황에서 신이라면 이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한다.
팀 켈러는 이렇게 ‘하나님은 선하지 않다’는 전제를 토대로 철학자들이 만든 “논리적 주장”과 “증거적 주장”이 있음을 말한다.1)
“논리적 주장”은 성경이 말하는 선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전능함과 세상의 악이 병립한다는 것 자체가 불합리하다는 것이다. ‘악은 신의 결핍’일텐데 신의 완전함은 악 자체로 부인된다는 논리다.
하지만 알빈 플란팅가는 ‘악의 존재와 신의 존재가 양립 가능하다’고 단언한다.2) 왜냐하면 악이 존재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부재한다고 말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악에도 필요악이 있고, 인간이 잘못보는 위장된 악이 있으며, 신의 영원적 관점에서 악의 허용이 절대적 선일 수 있기 때문이다. “논리적 주장”이 무신론의 분명한 근거가 되지 못 하게 된 이유이다.
그래서 철학자들이 새롭게 들고 나온 것이 “증거적 주장”이다. 인간이 당하는 고난만 보더라도 하나님이 없다는 것은 충분히 증명된다는 것이다. “나의 살과 가죽을 쇠하게 하시며 나의 뼈들을 꺽으셨고 고통과 수고를 쌓아 나를 에우셨으며 나를 어둠 속에 살게 하시기를 죽은 지 오랜 자 같게 하셨도다”(애3:3-5)
고난, 재난, 절망은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끊기에 충분하기 보인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고난은 도리어 무신론을 강화하기보다 하나님의 존재를 찾게 하며, 악을 회개하여 돌이키게도 한다. 이렇듯 하나님을 증명하는 도화선이 고난이 된다는 역설에서 “증거적 주장”의 논리도 역시 약화되어버렸다.
하나님이 없다고 말했던 철학자들의 주장이 이렇게 힘을 잃은 이유는 무엇인가? 인간에게 덮힌 그림자의 편향성이 결코 하나님의 광명의 크기까지는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 어디에 계시나이까? 나를 도우소서” 이것은 사실 모든 인간의 외침이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애3:33)
<예수다솜교회 박두진 목사>
1)팀 켈러, 고통에 답하다, 143.
2)알빈 플랜팅가, God, Freedom, and evil(Erdman,1974), The Nature of Necessity(oxford university press, 1974), 팀 켈러, 고통에 답하다, 143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