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에 답하다

고통에 답하다(37)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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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에 답하다(37)


인간의 손에 심판을 맡긴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 과연 정의는 실현될 수 있을까?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느끼는 부당함은 아이러니하게 법정의 판결을 보게 될 때이다. 인간에게는 참 법정이 필요하다. 우리 가까이에 있는 스포츠 심판도 온전할 수 없지 않는가. 오직 인간에게 맡겨진 심판은 도리어 편견과 대혼란을 엮어내기도 하고, 더 끔직한 보복을 불러오기도 한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을 내리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고, 사랑의 하나님이 심판을 하신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기도 한다. 하지만 인간의 심판대가 불의하다면 하나님의 심판대는 충분히 필요해진다. 성경은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다고 말씀한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그런데 생각과 달리 기독교의 심판은 공포의 개념이 아니다. 도리어 기다리게 하고, 갈급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언젠가는 참 정의가 실현되기 때문에 불의 속에 살던 이들은 살아갈 소망을 가지기 때문이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히10“30)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은 사람들에게 보복을 멈추게 만든다. 하나님이 친히 국문하셔서 가장 정의롭게 하실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앞서지 않게 한다. 도리어 죄를 짓는 것을 피하게 만들고, 작은 죄에도 용서를 구하게 하며, 하나님께 맡기며 슬픔을 위탁하게 만든다.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의 앞에 있으며”(사40:10) 하나님의 보응을 생각하는 이들은 자신의 공격적인 성향을 스스로 둔화시킨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은 절망으로 끝나지 않고 부활의 영광으로 새로 시작한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고전15:42) 부활은 단지 육신의 생명이 재활되는 것이 아니다. 다시는 썩지 않는 생명으로 새롭게 되어 풍성한 삶을 사는 것이다. 그 날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해도 달도 필요 없이 찬란한 영광을 누리며 참 공의와 사랑을 맛보게 될 것이다. 


때로 악이 간혹 선을 이루는 것을 볼 때가 있다. 그러나 악은 악인 것이다. 그러나 불행이 더 큰 행복을 위해 허용되었다면, 고난을 통해 더 온전해졌다면, 망가진 세상보다 더 월등한 세상이 있는 것을 알려주는 기재였다면, 악은 존재하지만 악은 패배할 것으로 보이지 않는가. 


이사야 선지자는 환상 중에 하나님의 영광을 뵙고,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사6:5)라고 말했다. 이사야는 하나님을 보는 순간 죄로 인해 멸망할 자신과, 그럼에도 살려주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발견했다. 만약 우리가 죄와 악을 알지 못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는 개념적으로만 이해하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악을 통해 하나님의 선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심판과 죽음을 통해 부활의 선물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이 갑자기 사라져버렸다면 부활을 생각해보자. 만약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을 보게 된다면, 무엇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겠는가?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21:4) 상실은 고통을 주지만 장차 다가올 행복과 비교할 때, 모든 괴로움을 기쁨으로 바꿔버린다면...그 기쁨이 대양처럼 끝없이 펼쳐진다면...무엇을 더 소중하게 받아들일 것인가? 


우리는 고난을 겪는다. 그러나 이 과정을 제외하고 하나님의 선물을 알 수 없었다면, 더구나 그리스도가 이 고난가운데 직접 오셔서 인간을 부르셨다면 나는 소중한 존재가 틀림없다. 


<예수다솜교회 박두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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