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에 답하다

고통에 답하다(12)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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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에 답하다(12)


고통의 가시를 뺀다는 것은 어린아이의 손에 박힌 가시를 뺄 때처럼 혼란스럽다. 아이들은 부모의 방법을 잘 이해할 수 없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방법을 찾는 것은 때로 납득하기 어려울 수 있다.

그럼에도 고통의 문제에 있어서 기독교의 독특한 점은 슬픔을 성숙하게 감당해 낼 수 있게 돕는다는 점이다. 기독교는 슬픔을 금욕의 대상으로 제한하지 않을 뿐더러, 이성의 힘으로 슬픔을 조절하는 것을 더 고상한 것으로 보지도 않는다. 많이 울어도 괜찮고 많이 울지 않아도 괜찮다.

기독교는 세상에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는 철학과 각 종교의 입장에 동감하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기에 고통을 감내할 뿐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그 신뢰로 이겨내게 만들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에서 ‘인생은 냉혹하니 너희도 냉정하게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이 주를 이룬다. 하지만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참 아버지가 되어 사랑으로 돌보시고 있음을 말한다. 가정이 산산조각나고, 내일을 꿈꿀 수 없을만큼 재정도 바닥이고, 어디 기대서 울 힘조차 잃은 이들을 위해 하나님은 아버지의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것이다.

세상은 고통이 운명이니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수많은 귀신이 사람을 잡아먹으려고 달려들고, 알 수 없는 운명의 사슬이 사람을 고통 속에 밀어넣는다고 말한다. 이 점에서 고대 로마와 헬라의 종교와 철학은 인간의 운명에 대해 결코 낙관적이지 않다. 

그러나 기독교는 하나님이 사랑이시며, 가장 선한 것을 주시고, 인간과 교제하도록 인간을 창조하시고, 세상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고 분명히 말한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자신들만의 왕국을 세우기 위해 반역했기에 세상에 고통이 들어왔다고 말한다. 

이것은 고통은 인간의 본연의 짐이 아니었음을 말한다. 그라서 하나님은 인간의 고통의 짐을 푸시고, 절망의 가시를 빼기 원하셨다.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고난의 문제에 인간 대신 직면하게 하셨고, 아들의 찔림과 죽음으로 해결하셨다. 하나님은 고통의 문제로 하나님을 외면하는 사람들을 향해 십자가를 통해 사귐의 요청을 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고통에 하나님의 고통으로 반응하셨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요일1:3)

<예수다솜교회 박두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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